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춘생문 사건 (문단 편집) == 사건 이후 == 수사 과정에서 사건의 배후에 김홍집 내각에 반대하는 세력이 있는 것으로 드러나 법무 대신 장박이 재판장으로서 사건 가담자들에 대한 재판을 진행했다. 재판 결과 주범으로 몰린 임최수와 [[이도철]]은 [[사형]]에, 이민굉, 이충구, 전우기는 종신 [[유배]]형에 처해졌으며 [[청안군(1851)|이재순]], [[안경수]], 김재풍은 [[태형]] 100대 후 징역 3년에 처해졌다. 이후 [[청안군(1851)|이재순]]만은 종친이라는 이유로[* [[철종(조선)|철종]]의 형 [[영평군(1828)|영평군]]의 양자이다.] [[사면]]되었다. 일본은 거꾸로 이 사건을 국왕 탈취 사건으로 몰아 갔고 [[물타기|명성황후 시해범들을 석방하는 논리]]로 이용했다. 즉, 자신들이 경복궁에 들이닥쳐 명성황후를 죽인 것이나 이 사건이나 다를 게 없다는 억지였다. 결국 명성황후 시해범들은 모두 무죄로 풀려났다. 이 사건이 일어난 지 세 달쯤 뒤에 결국 고종은 러시아 공사 [[카를 베베르|베베르]]의 도움으로 [[러시아 제국 해군]] [[수병]]들의 호위를 받으며 러시아 공사관으로 들어가 1년 정도 살게 된다. ([[아관파천]]) [* 춘생문 사건이 아관파천에 영향을 주었다는 평도 있다. 춘생문 사건처럼 요란하게 빠져나가려는 계획이 실패하자, 단발령 같은 을미개혁 조치에 반대하는 의병이 전국에서 일어나도록 독려하여 일본의 감시망을 느슨하게 만든 다음 은밀하게 빠져나갔다는 주장이다.] 이후 관련자들은 모두 신원되었다. [[분류:정치 사건 사고]][[분류:외교 사건 사고]][[분류:고종 시대/사건 사고]][[분류:수구파]][[분류:1895년/사건사고]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